
이방인, 알베르 카뮈
1부: 어머니의 장례식부터 살인 사건까지
양로원에 계시던 뫼르소의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하지만 뫼르소는 슬픔보다 빈소의 따분함과 운구 행렬 속 내리쬐는 햇볕을 더 크게 느낀다.
장례식 다음 날, 그는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옛 직장 동료 마리를 만나고, 잠자리를 가진 둘은 곧 연인이 된다.
그러다 이웃 레몽의 초대로 해변 별장에 놀러 갔다가 사건에 휘말린다.
레몽은 폭력을 휘둘러 헤어진 전 애인의 오빠 일행에게 미행당하고 있었고, 해변에서 그들과 충돌한다.
이후 뫼르소는 레몽의 총을 들고 다시 모래사장으로 향하고, 그들과 싸운 아랍인과 그곳에서 마주쳐 총을 쏴 죽인다.
2부: 수감 생활과 사형 선고
처음 이 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살인처럼 보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뫼르소가 레몽의 편지를 써주고, 경찰서에서 유리한 증언을 해주고, 굳이 권총을 들고 다시 해변으로 갔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한다.
무엇보다 배심원단을 사로잡은 것은 살인 그 자체보다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빈소에서 담배를 피웠고, 다음 날 마리와 코믹 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가졌다.
결국 사람들은 그를 “살인자”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 감정이 없는 인간”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다소 무심하게 세상을 대하던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야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고, 항소나 신에게의 기대 대신, 자기 의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쪽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사랑의 이방인들
뫼르소가 사는 아파트에는 레몽과 살라마노 영감이라는 두 이웃이 있다.
그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도덕적으로 전혀 모범적이지 않다.
애정은 있지만, 사랑이라기보다 뒤틀린 애착에 가깝다.
살라마노 영감은 아내를 일찍 여의고 늙은 개와 함께 산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로 개를 산책시키지만,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개를 때리기 일쑤다.
그런데 막상 개를 잃어버리자 무너진다.
오늘 밤은 개들이 짖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난 꼭 그게 내 개인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실 너무 사랑했노라고, 밤에 다른 개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노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사랑과 폭력이 얼마나 기괴하게 붙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레몽도 비슷하다.
그는 정부를 두고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소유와 폭력에 가깝다.
그는 자신이 매달 1천프랑에 가까운 돈을 주며 그녀를 책임졌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녀를 때리고 경찰에 신고당한다.
그의 애정은 끝내 타인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지 못한다.
뫼르소도 다르지 않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어쨌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한다는 점이고 ······.
마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말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에게 사랑은 부재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믿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감정에 가깝다.
사랑은 어쩌면 인생이고, 인생은 어쩌면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이방인들인 이들은, 결국 인생의 이방인들이기도 할 것이다.
직접 연결되는 장면은 아니지만, 회사 사장이 뫼르소에게 파리 전근을 제안했을 때 그가 이를 거절하는 대목을 읽으며 이 셋이 떠올랐다.
남들이 보기엔 바뀌어야 할 삶일지라도, 뫼르소는 삶 전체를 그렇게 단순히 재단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내게는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모범적이지 않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서툴고 뒤틀려 있다고 해서, 그 삶 전체까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발적인 살인과 극악무도한 괴물, 그 사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뫼르소는 사이코패스나 괴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는 감정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기보다 감정을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연기하지 못하는 인간에 가깝다.
그는 경제적 이유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장례식 날에는 뜨거운 햇볕과 피로를 더 크게 느꼈고,
마리와의 관계에서는 사랑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건 좋다고 말한다.
직장에서는 특별히 불성실하지 않고,
개를 잃은 살라마노 영감을 위로하기도 하며,
레몽을 돕는 일 역시 그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았기에 한 것이다.
살인 역시 그의 서술 속에서는 치밀한 악의보다,
그날의 햇볕과 열기, 몸의 피로, 우발적 충동에 훨씬 가까운 사건처럼 보인다.
나는 내가 육체적 욕구 때문에 종종 감정이 교란되기도 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판사와 배심원단은 그의 이런 정직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살라마노, 마리, 마송, 레몽의 호의적인 진술보다도,
양로원 원장과 수위,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노인 페레의 증언, 즉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아니, 대체 피고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것 때문에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여서 기소된 것입니까?
사실 장례식과 살인은 어쩌면 깊게 연결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둘을 너무 손쉽게 이어 붙였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거기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례식에서 피곤에 짓눌려 슬픔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의미 있는 연결”이라고 믿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서사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직함이 살인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살인과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의 열기와 순간의 충동 때문에 사람을 쏴 죽인 일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뫼르소는 끝까지 자기 감각에 정직한 인간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정직함은 무죄의 증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인간의 진실한 감정이 때로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이방인』을 읽고 나면 뫼르소를 쉽게 좋아할 수도, 완전히 혐오할 수도 없게 된다.
그는 분명 사람을 죽였고, 그 죄는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판 내내, 그가 사람을 죽인 일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로 더 강하게 심판받는 장면 앞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의 소설인 동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한 인간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 판단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말 사실만 보고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보고 싶은 의미를 덧씌운 뒤 그것을 진실이라 부르고 있는가.

오늘 리뷰한 이방인, 페스트 등의 소설로 널리 알려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for his important literary production, which with clear-sighted earnestness illuminates the problems of the human conscience in our times
우리의 시대 속 인간 양심의 문제들을 비추는 투명한 시야의 정직함을 기반으로 한, 그의 중요한 문학 활동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담담히 풀어내는 그의 문체가 인상 깊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방인을 읽으면서 인간실격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이방인은 남과 다른 뫼르소를 외부에서 이방인이라 칭하는 경우고,
인간실격은 남과 다른 요조가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이라 칭하는 경우겠지요.
알베르 카뮈(1913~1960)는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군인이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하고 청각 장애인인 어머니와 가난하게 자랐다. 대학교 입시반에서 평생의 스승인 장 그리니에를 만나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실존주의 문학의 위대한 작가로 일컬어지는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60년 안타까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이방인>, <페스트>, <전락> 등의 소설과 <카리쿨라>,<오해> 등의 희곡과 <시사평론>과 같은 사회참여적인 작품이 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줄거리
주인공 뫼르소는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이틀간의 휴가를 받고 장례식을 마친 뫼르소는 우연히 회사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즐기며 교제를 시작한다.
뫼르소는 레몽의 부탁으로 집을 떠난 그의 여자친구에게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대신 써주었다. 레몽은 집에 온 여자친구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했다. 뫼르소는 경찰서에서 그 여자가 레몽을 무시했다고 증언을 한다.
레몽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레몽에게 원한이 있는 아랍인들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뻔하지만 뫼르소는 레몽의 싸움을 말리며 총을 빼앗는다. 잠시 후 혼자 해변을 걷던 뫼르소는 바위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랍인을 총에 쏘아 죽이고 재판에 회부된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 냉담했던 태도와 장례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사회의 근본적인 규율을 무시하고 있다며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장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삶의 태도
사장은 내게 삶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쨌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p74
뫼르소는 파리 지사로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라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의 연인 마리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원한다면 결혼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어보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도 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열정을 품는 게 젊은이의 특권이라고들 한다. 인생이란 어딘가 도전해서 성취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 뫼르소처럼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사장과 연인이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뫼르소의 삶이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타인을 의식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까닭이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범행의 이유
나는 빠르게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p151
뫼르소는 혼자 해변으로 나섰다가 바위 그늘 속에 누워있는 아랍인을 발견하고 총으로 쏘아 죽인다. 재판장에서 죽인 동기를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레몽이 권총을 건네줄 때 태양이 번쩍하며 미끄러졌다. 태양이 아랍인의 칼에 반사되어 번쩍하는 칼날처럼 자신의 이마를 쑤셨고 권총을 꽉 쥐어져 방아쇠가 당겨졌다고 표현한다.
그 아랍인은 레몽과 원수인 관계로 뫼르소가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아랍인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든다 해도 뫼르소가 그 자리를 피하면 될 것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이유가 태양 때문이라니 아랍인의 죽음이 허망하다. 피해자의 목숨을 너무도 하찮게 여긴 게 아닌가 말이다.
당시 프랑스령 알제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인 것쯤이야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시절이었고 한다. 레몽이 권총을 가지고 있고 이에 반하여 아랍인들은 칼로 대항하려는 것만 봐도 힘의 불균형이 느껴진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늘 예외가 있어왔다. 권력에 의한 차별과 억압은 세상의 종말이 와야 끝날 듯싶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부조리한 인생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인간들의 심판이라고 내가 지적했다.... 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었다.
p171
뫼르소의 재판은 살인 사건보다 엄마의 장례식과 이후 행한 그의 행동에 집중이 된다. 검사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보낸 그를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보일 줄 모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도 없다. (p151)'라며 사형을 구형한다.
살인은 잘못된 행동이며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는 이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의 태도에 더 큰 죄를 묻는다.
부모가 죽으면 삼년상을 지내고 청상과부가 되어도 죽을 때까지 수절을 지켜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관습, 윤리, 종교적 해석에 따라 죄와 벌이 달라진다.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부조리한 세상에 조금은 유연하게 살아야 한다. 죽을 날이 머지않았어도 삶의 희망을 느끼는 뫼르소처럼 지금에 충실하면서 말이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마무리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뫼르소의 행동은 기이하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이웃의 잘못된 행동에 무심하다. 우리는 대다수가 옳다고 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뫼르소처럼 이방인으로 소외될까 두려운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일이 나의 발언 없이 진행되었다.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정해지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모두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하고 싶었다.
본질 없는 판단과 시선은 항상 억울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모두에게 해명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도록 내버려두고 나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나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이미 그 자체로 억울하지 않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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