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시인이 직시한 죽음… "詩로 쓰면 덜 두려워요"
등단 66년 황동규 4년 만의 시집

시인 황동규는 “지지 않으려 했다.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죽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이 시집의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다.’ 스무 살에 등단한 시력 66년의 현역 시인 황동규(86). 그가 4년 만에 열여덟 번째 신작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사)를 내며 적었다. 하지만 특유의 유쾌함으로 괄호치고 덧붙인다.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그를 만났다.
“잔인하게 해도 괜찮아요. 봐주면 안 돼.” 시인이 자세를 곧추세우더니 씩 웃었다.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부터 약 반세기 동안 그의 시에 한결같이 흐르는 정신은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은 1970년대 유신 치하에서 쓰였다. 이번 시집은 ‘늙음’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기 위한 시인의 분투다. 그는 여러 차례 “굴복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죽음이 성큼 다가와 어른거린다. ‘극락전에 맴돌던 호랑나비가/ 꿈속까지 날아와 춤을 췄지만/ 극락을 꿈꾼 적은 없었다./ 삼인칭들끼리 모여 사는 곳으로 갔다’(‘묘비명’). “말하자면 종교 없는 자의 고백인데, 나는 인간다움을 믿습니다.” 가는 날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쓴 시도 있다. ‘세상 뜰 때/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중략)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그날 저녁’ 중에서). 그러나 어둡지 않다. 그는 “이런 걸 쓰면 죽음을 덜 미워하고, 덜 두려워하게 된다”고 했다. 장경렬 문학평론가는 이를 ‘환한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와 다감함”이라는 것.
그 환함이 황동규의 시 세계를 지탱해왔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극(劇) 서정시’라고 칭한다. 극적 사건이 있다는 뜻이다. “내 시는 시작과 끝이 같지 않아요.” 무언가 발견하거나,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으며 처음과 달라지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시에 담았다.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봄비를 맞다’ 중에서). 그 변화 덕에 인간은 의지를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 ‘조그만 만남이라도 산 것과 마주치면/ 생짜 삶이 화끈하게 달려든다’ (‘속되게 즐기기’ 중에서).
시인은 요즘도 매일 시를 쓴다. “밥 먹는 것과 같아서”다. 하지만 “한 권의 시집을 낼 만한 힘이 뭉쳐지진 않을 것 같다”며 “다음에는 시·산문을 합쳐 유고집이 나오지 않을까” 담담히 말했다. “물론 코로나 비슷한 게 또 와서 그거랑 싸운다면 어떨지 모르지요.” 시집을 여는 시 ‘오색빛으로’는 한평생 시인으로 살아온 그의 예술가론. “내 몸을 다 내어주면서, 죽을 때까지 오색빛을 비춰주고픈 마음”에 대해 썼다. 그 힘은 “인간의 인간다움에서 나온다”고 했다.
“인간의 삶에는 즐거움보다 고통이 많아요. 그런데 그건 극복하라고 주어진 거예요. 극복하는 데 인간다움이 있어요.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매력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굴복하는 인간은 어떻게 될까. 시인이 답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인 거지요.” 삶의 끝자락에서도 바퀴 굴리기를 멈출 줄 모르는 지독한 휴머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