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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한강-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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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주인공 간략 소개, 인상적인 구절

경하의 몸 상태

주인공 경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는 소설가이다. 책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찾는 과정에 나쁜 꿈을 꾸며 정신적이나 체력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힘들어하는 감정선이 그대로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연속으로 무거운 소재를 썼기에 심적으로 힘든 부분을 경하라는 인물을 가상으로 설정해 한강 작가님의 현 상황을 표현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

 

인선의 사고 난 경위

인선은 영상 촬영이자 목공방을 하는 경하와 친구 사이다. 둘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친해졌고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다가 인선이 작업하다 다쳐 서울로 오게 되면서 제주도에 있는 새가 걱정돼 물과 음식을 챙겨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한다. 인선의 부모님은 제주 4,3의 피해자로 외삼촌을 찾아 나서는 과정, 잔혹한 이야기를 경하와 대화식으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위에 사진 자체에 새들에게 오늘은 언제까지 나가라는 문장 자체가 제주 사건 당시 7년 이상 이어진 이 사건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란 함축적 의미로 생각이 들었다.

경하는 인선이의 집을 가기 위해서 길을 찾던 중에 잃어버리게 된다. 눈과 추위로 극심한 상황이었는데 "하지만 새가 있어"라는 표현자체가 사건 당시에 나는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버텨내자라는 의미로 느껴졌다.

 

느낀 점

 한강 작가님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소년이 온다"라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쉽지 않은 이야기를 쓰신 용기와 마인드가 정말 멋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 작별하지 않는다 줄거리도 제주 4. 3건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도어 사용

4.3사건은 무력 진압을 통해 7년 이상 걸쳐서 제주도에서 수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처참함과 슬픔을 녹여내고 있다. 꼭 전달하고 싶은 상황이나 대화는 글씨 크기를 키우거나 기울여져 표현해 차별화를 준 점과 배경이 제주도이다 보니 중간중간 제주도어가 나와 한강작가님의 섬세한 분이라는 게 느껴졌다.

표현법에 집중해 주세요!

작별하지 않는다 완독하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과거, 현재 시점이 계속 교차되어 있는 점도 많고 인선이의 부모님 사례인지, 인터뷰 사례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자주 추구하는 장르 스타일이 아니기에 덮을 수 있었을 텐데 결론적으로 아름다운 표현들을 처음 접해봐서 더 오랜 시간 책과 한강작가님을 기억 속에 남길 것 같다.

과거에는 무력으로 진압한다거나 바로 사살하는 사건이 정말 많았었다. 현재 시대에서는 폭력 사태가 많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일부 나라는 아직도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미래에 오늘 다루는 사례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어서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4.3 사건, 민주화 운동, 6.25 전쟁 더 많은 일이 있지만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그 분들을 마음속에 계속 새겼으면 좋겠다. 소재만으로도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가볍게 읽을 수도 없고 읽어서도 안 되는 책이다. 일처럼 작정하고 읽어나가야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형식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나와 그녀, 대화와 서술, 현실과 몽환이 혼재되어 있어서

잘 분별해서 읽어야 한다. 하다못해 대화체마저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은데다가, 구어체의 제주도 방언은 번역없이 순조롭게 이해하기 어렵다.

 더 힘든 것은 서사의 내용이다.

 몽환적 상징의 난해한 꿈 이야기로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악몽에서 깬 현실은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나 경하와 친구 인선이의 딱한 처지와 현실적 고통은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막다른 상황이다.

 그 상황을 읽어가노라면 읽는 이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특히 인선이 목공 일을 하다가 전기톱에 잘려나간 손가락을 봉합 수술한 뒤에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하는 조치는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다. 마치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환자처럼, 독자도 고통 때문에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없게 만든다.

 

 미세한 서술적 기법도 서사에 빠져들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소설은 독자들을 서사 속으로 끌어들여서 감정이입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데, 상황과 장면의 미세한 묘사로 서사의 전개를 지체하는 탓에 이야기의 줄거리 속에 몰입을 차단하게 만든다. 마치 소설이 아니라 난해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으로 말하면 비구상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속도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보다 섬세한 상황 묘사가 지루해서 도무지 작품 속에 끌려들지 않는다.

 묘사가 워낙 실감 나서 실제 경험이 아니고서는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의심할 정도이다. 독자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면서 까지 사실적 묘사에 치중한 것은 이 소설이 한갓 허구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라, 실제 사실과 체험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한다. 의도가 그렇다 하더라도 과도한 묘사는 서사적 몰입을 지체시키는 역기능을 한다. 그럼에도 경하가 인선의 외진 시골집을 혼자 찾아가는 과정은 워낙 아슬아슬해서 몰입이 된다. 차가 끊길 시간인데다가 산골의 어두운 눈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경하는 인선이 두고 온 새를 구하기 위해서 험지로 파견된 목숨 건 구조대나 다름없다. 경하가 온갖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인선이 기르던 새 ‘아마’는 죽었고 경하는 추위 속에서 고립된다. 다시 위기에 처했는데 마치 꿈처럼,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할 인선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어떻게 입원 환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 경과는 불가사의로 남겨 두었다. 환상과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 전후로 인선의 다큐영상이나 인선의 어머니의 증언, 그리고 모아둔 4.3 자료를 통해서 끔찍하고 가혹한 살상 상황이 생생하게 밝혀진다. 그것을 매개하는 주체는 인선이다. 생존자를 인터뷰한 영상작업으로 증언하는가 하면, 인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모아둔 스크랩 자료를 열어서 4.3 사건과 보도연맹 피해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참상을 폭로한다. 그 가운데도 제3의 시선이 아니라, 부모 형제의 처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한 인선 어머니의 체험담이 가장 절실하고 절박하다.

 13세에 겪은 일이다. 두 자매가 외가에 잠깐 다녀오는 사이에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한데, 시신 위로 눈이 내렸다. 자매는 시신의 “얼굴에 쌓인 눈을 한 사람씩 닦아가다 마침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았는데, 옆에 있어야 할 오빠와 막내가 안 보였”다. 시신 더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죽음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두 자매는 초조해져서, 보리밭과 불탄 집터의 시신들을 헤집고 다니다가 마침내 총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막내를 찾아낸다.

 세 자매는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당숙 집에 들어선다. 그렇게 업고 온 8살짜리 막내는 앓는 소리조차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언니는 손가락을 깨물어 앞니가 빠진 자리에 손가락을 넣어 피를 먹여 준다.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얼마나 행복했으면...! 이처럼 울컥하게 만드는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다.

 

 서사의 가운데로 진입하게 되면 마치 알 수 없는 세계에 갇힌 것처럼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다. 끔찍한 증언과 참상은 인선의 손가락 봉합 수술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왜소한 사건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서사의 주체는 나에서 인선, 인선 어머니로 이동한다. 인선 어머니는 오빠의 행방을 쫓아 다니며 누구보다 열렬하게 4.3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모든 학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데 철저했다. 나중에 치매 증상으로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지만, 어린 동생을 살리려고 단지하여 수혈하던 상황만은 또렷이 기억하며, 잠들어 있는 딸 인선에게 손가락을 물리고서 아이처럼 울곤 했다.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이자 아물 수 없는 트라우마이며, 결코 작별할 수 없는 치명적 상처이다.

 

 경하와 인선이 영상 작업의 제목을 “작별하지 않는다”로 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작별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잘못된 역사의 참혹한 상처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고 찾아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것이 산자들의 의무이자 역사의 기능이다. 우리는 4.3에 관한 한 역사적 치매 증상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치매 증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이 겪는 현실적 고통과 죽음의 위기를 추체험하도록 만든다.

 인선 어머니처럼 비록 치매를 앓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일, 작별하지 않아야 할 사람은 그리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역사적 치매 속에 살아왔다. 군사정부가 끝날 때까지 4,3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못했다. 멀쩡하게 기억하고 있는 역사를 깔아뭉개 왔던 것이다. 독재정권은 폭력적으로 국민들을 치매환자로 만들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오랜 치매 상태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만든다. 그러자면 읽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고통 없이 치매 상태에서 깨어날 수 없다.

 

 구성으로 볼 때도, 이 작품은 4.3 사건을 서사적으로 꿰어낸 역사소설이 아니라, 피해자 유족의 체험과 구술 증언을 조각보처럼 기워낸 삽화적 구성의 다큐소설이라 할 수 있다. 4.3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증언한 다큐 소설이 명랑하거나 평온할 수 없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제주사람의 고통을 제주사람의 말로 전하려면 제주방언이 제격이다. 굳이 알아들기 힘든 제주말로 증언한 이유이다. 제주사람들의 고통을 육지인의 말로 번역하는 순간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소설의 입구와 출구는 상당히 몽환적이지만, 핵심을 이루는 증언 부분은 사료에 입각해 있어서 명료하고 정확하다. 경하와 인선이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현실적 고통도 만만찮은데, 인선 어머니가 겪은 증언을 들어보면 현실의 고통은 오히려 가볍기 그지없다. 작품을 읽다가 보면 유족들이 겪는 트라우마처럼 독자들에게도 그러한 징후가 감염된다. 하물며 딸에게 미친 징후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인선은 트라우마를 겪는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엄마 탓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엄마가 돌아가자 오히려 그 트라우마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되어 증폭된 것이다. 따라서 4.3의 상처와 작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작별할레야 도무지 작별할 수 없다. 트라우마가 작별을 허용하지 않는 까닭이다.

 경하에게 숙제처럼 남겨져 있는 영상작업은, 바닷가에서 사살된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간 무덤 없는 무덤을 기리는 상징 같은 작업이다. 아무리 구해 달라고 빌어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 절망 속에 죽어갔던 유령들을 달래는 의식이기도 하다. 영상작업이 힘에 부치는 일이긴 하나, 유족으로 활동한 인선 어머니가 기울인 일생의 노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처음 영상작업을 제안한 경하보다 오히려 인선이 더 적극적으로 작업 준비를 하고 기다린 것도 이 때문이다. 무참하게 죽어 뼈와 뼈가 뒤섞인 채 묻혀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인선은 이미 영상작업을 작정하고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그 작업을 위해 인선이 정해둔 터를 찾아 반토막의 촛불을 켠 채 어두운 밤길을 눈을 맞으며 찾아가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눈은 계속 쏟아지는데 가녀린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알 수 없는 숲길을 지나 목적지에 이르자, 인선은 아예 눈속에 누워버린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돌아갈 촛불마저 꺼졌다. 다만 부러진 성냥개비 한 알이 전부였다.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을까? 불을 붙인다고 하여 다 닳아버린 초가 버틸 수 있을까? 초가 버틴다고 하더라도 쓰러진 인선을 데려갈 수 있을까? 불이 당겨지면 인선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인선의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인선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병상에서 눈을 뜬 것이다. 인선과 나눈 모든 대화는 환각일 뿐이란 말이다. 부러진 성냥개비가 마지막으로 불을 일으키긴 하지만, 마치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처럼 죽음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악몽에서 시작하여 죽음을 내장한 환상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서두와 결말은 하나의 액자일 뿐 그 속에 담겨져 있는 4.3의 진실은 생생한 역사이다. 우리는 한갓 꿈과 환상의 액자만 보아왔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그 액자 속의 진실을 제대로 파고들어 본 적이 없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치매로 모든 기억들을 다 잊어버려도 그날의 참상을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처럼, 독자들 또한 그 트라우마에 어느 정도 감염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읽기도 힘들었지만 읽고 나서도 힘들다. 고통스럽게 읽지 않고는 처참한 고통의 역사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고통의 상흔이 잔상으로 남아있지 않는다면 작품을 온전하게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쓰라린 아픔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작별할 수 없게 만든다. 읽는 사람의 마음도 이러하거늘 작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작가의 말 대로 “지극한 사랑의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덮었던 책장을 다시 열어보게 하는 책이다. 작별하기 어려운 작품이자 노동의 보람을 안겨주는 소설이다.(인용해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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