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

반응형

 

 

"부인은 자신이 잠겨있던 생각에서 화들짝 깨어나서

오랫동안 별다른 의미도 없다고 단정하던 말에

의미가 생겨나 있음을 깨달았다.

"실수를 저지른 이 누구인가?""

- 등대로 中 -

 

안녕하세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를 정리해보았습니다.

『등대로』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만큼이나 읽기가 힘들고 까다롭습니다. 모두 세 부로 이뤄져 있는데, 각 부 사이의 연결 또한 긴밀하지 않다고 느껴지죠. 그래서 아래의 리뷰를 먼저 한 번 살펴보시고 (약간 흐린 눈으로) 주르륵 읽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1부: 창(The Window)

2부: 시간은 흐른다(Time Passes)

3부: 등대로(The Lighthouse)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썼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 써서 읽다가는 금방 지쳐 버릴 거예요. 그렇게 많은 의미를 얻지 못한 채 말이죠..! 다만, 여기서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 함은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보다는 한 등장인물이 속으로 생각하는 그 의식을 중심으로 소설이 진행된다는 뜻이죠.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가 별로 없고 자신의 삶과, 과거와, 상대방과, 어떤 인물들에 대해 끊임없이 떠올리고 회상하는 것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 할 수 있죠.

그럼 이제 각 부 간의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작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를 중심으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창(The Window)

제1장은 헤브리디스 제도의 스카이섬에 있는 램지 가문의 여름 별장에서 보내는 단 하루의 오후와 저녁을 다룹니다. 어차피 이 1장에서 등대는 구경조차 하지 않으니 언제쯤 등대를 보러 가게 되는지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ㅎㅎ

여섯 살 아들 제임스는 내일 등대에 갈 생각에 부풀어 있지만, 아버지 램지 씨는 날씨가 나쁠 것이라며 찬물을 끼얹습니다. 지금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실'만 중요하고 '감정'은 중요하지 않은 전형적인 T인 사람이군요. 반대로 램지 부인은 실망한 아들을 달래며 주변 손님들을 살피고, 저녁 만찬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애씁니다. F스러운 램지 부인은 제임스뿐 아니라 다른 자녀들과 마침 집에 와 있던 다른 손님들의 기분까지 고려해 적절하게 처신하면서 그날 밤의 쎄했던 분위기를 무마하죠. 참 친절한 사람입니다.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 말해 보려무나."

그는 아주 바보도 아니면서 나침반 눈금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도 모른다."

그리고 집에 있던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램지 부인의 초상을 그리려 하지만, 그녀는 그림 그리기에 어려움을 겪죠.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릴리의 '그림 그리기'는 다분히 상징적인 소재입니다. 그녀는 "여자는 글을 쓸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는 남성들의 냉소와 싸우며 자신의 시각을 지키려 하거든요. 따라서 그녀의 주저함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미술 법칙(원근법과 질서)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진실을 찾으려는 투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릴리를 '전통적 여성상에 저항하는 예술가'라 할 수 있죠.

"그녀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짜냈다.

오직 나만은 보편적인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인정해 달라고 탄원한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고,

나 자신으로 있고 싶고,

결혼생활은 맞지 않는다고 늘어놓으며.

부인은 틀림없이 최고로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마 세상에서 제일 선량한 사람일 것이었다.

그러나 저기 보이는 완전 무결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왜일까?

어떻게 다른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팔레트에서 파란색과 녹색의 덩어리를 떼어냈다."

램지 부인은 이 소설의 구심점이자 '모성' '조화'의 화신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전통적인 여성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램지 씨와 대비됩니다.

그럼 램지 씨는 어떤 인물일까요? 철학자인 그는 지적 열등감과 죽음 이후의 명성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유아독존적 가부장입니다. 그는 아들의 희망(내일은 등대를 보러 갈 수 잇을까?)을 꺾는 냉혹한 진실("날씨가 안 좋을 것이다")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지적 권위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적 위치가 'A에서 Z까지' 중 어디쯤인지에만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이성이 결여된 논리가 얼마나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여자란 저런 생물이다.

여자들의 애매모호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전부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그녀도, 아내도 그랬다.

여자들은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램지 씨의 공격적이고 몰인간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램지 부인의 역할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거죠. 하지만! 램지 부인의 헌신은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돌보느라 자신의 자아를 지우는 자기희생적 강박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남성들의 허약한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감정 노동을 수행하며, 모든 사람을 결혼시켜야 한다는 고전적인 가치관에 집착합니다. 그녀의 친절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독립적인 삶을 자신의 질서 안에 가두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저 아이들은 완전히 행복해질 수 있어.

나는 마치 닦달하듯이,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피난처라도 되는 양 너무나도 성급하게,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해 버리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 램지 부인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는 마음씨 좋은 여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엄마, 아내, 여성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 한계 또한 뚜렷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1장은 이렇게 갈등만 나열해놓고 끝나지 않습니다. 온 가족과 손님들이 모여 함께 저녁 만찬을 즐기는 모습에서 나름대로 통합의 가능성을 암시하거든요.


 

2장. 시간은 흐른다(Time Passes)

2장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실험적인 장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실험적'이란 뜻은 기존에 우리가 읽던 소설의 느낌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뜻하죠.

1부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나와서 대화도 하고 (그래봤자 반나절이지만) 어찌어찌 시간의 흐름도 나타났다면, 2부에서는 갑자기 10년이란 세월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그것도 아주 건조한 문체로 나열해 버리죠. 그래서 정말 말도 안 되게 지루합니다...! 아 솔직히 울프 공부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읽었지, 이거 재미로 읽으려 했으면 진짜 중간에 덮어버렸을 거예요 ㅜㅜ

암튼 2부에서는 그러면 사람은 잘 안 나오고 뭐가 대신 나오느냐! 대신 빈 별장을 점령한 바람, 먼지, 어둠, 그리고 덩굴 식물들이 주인공이 됩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사망, 딸 프루의 산욕열 사망, 아들 앤드류의 전사 소식은 괄호 안에 담긴 짧은 문장으로 처리됩니다.

이러한 서술은 '자연의 무관심'을 보여줍니다. 음... 무관심이면서 '무심함'이라고 하면 더 좋겠네요.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1부에 나왔던 자신만만해 보였던 사람들의 존재가 한 문장의 괄호 속에서 소멸하는 연출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거대한 냉소라 할 수 있습니다. 별장은 서서히 썩어가고 파괴되며,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드러냅니다.

"나는 찰스 탠슬리다.

이것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머지않아 온 세계 사람들이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연의 무심하지만 꾸준한 파괴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한 존재로만 남아 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작가는 그렇게 냉소주의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않거든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맥냅 부인입니다. 늙은 청소부인 그녀는 무너져가는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인간적 노동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행동에는 램지 부인 같은 우아함은 없지만, 삶을 지속시키는 원초적인 생명력이 있죠. 울프는 지식인들의 고상한 사유보다, 묵묵히 먼지를 털어내는 하층 계급의 노동이 시간을 견뎌내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정리하자면, 울프는 시간을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파괴하는 힘'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을 '늙게 하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인간이 구축한 질서, 사랑, 지성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먼지 한 톨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허무주의라 할 수 있죠. 하지만 2부 전체를 허무주의라고 볼 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대부분 남성들에 이룩돼 왔던) 인간 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 폐허 속에서도 누군가는 다시 창을 닦고 정원을 손질한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끈질긴 생존 의지를 대조합니다.


3장. 등대로(The Lighthouse)

마지막 3장입니다. 1장과 같은 장소이지만 시간은 10년이 흐른 상태죠. 2장 동안 10년이 흘렀으니 말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아픔도 어찌어찌 지나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과거의 별장을 다시 찾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램지 씨는 과거에 가지 못했던 등대에 가기로 결심하고, 성인이 된 제임스와 캠을 등대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아들 제임스와 캠은 마지못해 따라갈 뿐이에요. 가기 싫지만, 워낙 가부장적인 아빠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죠.

"불만이 그들을 짓눌렀다.

우리는 강요당했어, 명령 받았어.

아버지는 음울한 얼굴로 권위를 휘두르며

우리에게 또다시 압박을 가하고 그 명령에 따르게 했어.

이 화창한 아침에 꾸러미를 들고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등대에 갈 테니 따라 오너라.

아버지가 가고 싶었기 때문이야."

한편 별장에 남은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10년 전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램지 씨 일행이 등대에 도착하는 순간, 릴리 역시 캔버스에 마지막 선을 그으며 자신의 비전을 완성합니다. 물론 타이밍 맞춰서 딱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극적인 장치지만요!

3부의 램지 씨는 여전히 괴팍합니다. 하지만 10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램지 부인이 곁에 없기 때문인지 뭔지 정확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10년 전보다 더 절박하게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죠. 때문에 그가 등대에 도달하려는 행위는 죽은 아내에 대한 뒤늦은 헌사이자, 자신의 철학적 사유가 닿지 못했던 '인간적인 곳'을 직접 확인하려는 실존적 도약입니다.

하지만 램지 씨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말로 전달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아들 제임스와 캠은 여전히 아버지의 강압적인 권위에 반감을 느끼죠. 하지만 등대까지 가는 배 안에서 아버지의 고독과 늙음을 목격하며 연민과 이해라는 복잡한 감정에 도달합니다. 또 제임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조타 실력을 칭찬해줄 때, 평생 갈구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을 얻으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아버지는 좀처럼 아들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거든요) 다만, 이건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가부장제에 의지해 있던 아버지가 '늙어 가는 약한 인간'이 됐음을 보고 느끼는 연민의 시선과 성숙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실수를 저지른 이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관찰자 역할을 하면서 작가의 시선을 대변해주는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죽은 램지 부인의 유령과 같은 기억과 대화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그녀는 램지 부인을 신화화하지 않고, 그녀의 모순과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가졌던 '조화의 힘'을 예술적 구도로 승화시키죠. 일행이 등대에 도착한 타이밍에 그림의 마지막 선을 긋는 행위로 이질적인 두 낡은 세계의 화해와 극복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등대' 또는 '등대로의 여정'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등대에 도착하는 물리적 여정과 그림을 완성하는 정신적 여정은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램지 부인은 죽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릴리의 그림 속에, 그리고 가족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삶을 지속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등대는 도달해야 할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바라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진실' 그 자체입니다. 즉, 하나의 정해진 상징으로 쓰이기보다, 등대에 가는 사람이 누구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냐에 따라 달라지는 '극복'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이 향하고 있는 등대엔 무엇이 있을까요?

 

 

 

1. 의식의 흐름 기법

1800년대의 소설들이 대체로 '사실주의 소설'로 분류된다면 1900년대 초반에는 모더니즘 작가들이 등장한다. 이들 중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사뮈엘 베케트 등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종래의 사실주의 소설처럼, 객관적인 사실들을 위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의 의식을 상세히 따라가면서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젊은 예술가의 초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등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분류되는 듯하다.

나는 20대 중반쯤부터 가끔 일기를 쓰곤 했다. 일기를 쓰다 보면 육하원칙에 맞게 사실적으로 쓰고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곤 한다.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다음 시점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하는 것을 시간 순으로 혹은 인과관계를 들어서 잘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너무 사실적으로 쓰려다보면 정말로 내가 일기를 쓰게 된 계기, 마음이 동해 키보드를 잡은 동기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컴퓨터를 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느덧 마음 속에서 휘발되고, 단조롭게 과거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게 되는 것이다.

일기에 써야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도 필요할 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주관적인 감정과 감상, 인상들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상들이야만 한다. 제3자가 보기에는 의미가 없어 보일 지 몰라도 써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일기를 쓰면서 생각했던 적이 있다.

울프의 생각도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열린책들'의 해설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울프는 1919년 에세이 「현대 소설론Modern Fiction」에서도 개진했듯이, 현실은 전통 소설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사실주의적인 세부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상들의 소나기〉라고 보며,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런 삶의 실체를 그려 내려 한다. 다시 말해, 부모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대신, 무수한 단면을 지닌 의식의 흐름으로 부모의 온전한 초상을, 그들이 살았던 삶을 그려내면서 삶과 죽음과 세월의 의미를 천착하려는 것이다.

열린책들(해설), p. 288

작년,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게 되면서 나도 덩달아 한강 작가의 책들을 두 권 정도 읽고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도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강의 글이 너무 어둡다고, 혹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게 왔다갔다 한다고 비판했다. 한강 작가의 쓰는 방식도 논리정연하다거나 사실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작법이 아니고서는 「희랍어 시간」에서 그렇게 섬세한 디테일을 그려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 2. 소설의 배경

## 2.1 공간적 배경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 본인의 자전적인 면이 많이 반영된 소설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울프가 런던 태생인 것과는 다르게 소설 속 공간적인 배경은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의 스카이(Skye) 섬이다.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섬의 언덕에서 저멀리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소설의 제목에는 '등대'라는 단어가 나오고, 책의 후반에는 어부들과도 함께한다.

## 2.2 다복한 가족 공동체

빅토리아 시대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다복한' 가족이 이상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구성원이 많은 이 공동체를 케어했던 건 그 집의 안주인이자 주인공인 램지 부인 혹은 울프의 어머니였다. 램지네 공동체의 또다른 특징은 '식객'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찰스 탠슬리, 폴 레일리, 민타 도일, 오거스터스 카마이클, 릴리 브리스코, 윌리엄 뱅크스 등의 사람들은 당대의 석학 램지 씨를 따르는 젊은이 혹은 친구이거나, 따뜻하고 사려깊은 램지 부인의 초대를 받아 온 사람들이었다.

이 특이한 공동체는 실제 울프네 가족이 이루었던 8남매 가족의 여름 별장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울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버지니아 울프의 4남매가 중심이 되어 만든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을 떠올리게도 한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다양한 영국의 인사들, 철학자와 작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함께 어울려 지냈던 친인척 단체이다. 여기에는 버지니아 울프(작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경제학자), E.M. 포스터(작가), 버네사 벨(화가), Lytton Strachey(비평가), 비타 색빌웨스트 (작가)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나오는, 수정자본주의를 만든 케인스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 재밌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의 모델이 된 사람으로 알려진 울프의 친구 색빌웨스트도 여기에 속해있다.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도 이 그룹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 3. 램지 부인의 오지랖 : 커플 만들기

램지 부인은 자주, 아직 짝이 없는 남녀의 결혼 혹은 사랑을 주선하려 한다. 램지 부인 본인의 결혼생활은 아름다울지언정 완벽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녀는 윌리엄스 뱅크스와 릴리 브리스코를, 폴 레일리와 민타 도일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민타도 모두들 결혼해야 해요. ...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거든요.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독신 여자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을 놓치는 거에요.

민음사, p. 83

그런데 이제 민타와 폴 레일리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다시 삶을 다소 불행한 것으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협상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든, 그녀 자신은 모두에게 일어날 필요가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도 도피처가 되는 양, 그녀는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고, 사람은 자식을 두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빨리,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음사, p. 99

아, 그런데 저기서 함께 거닐고 있는 사람은 릴리 브리스코와 윌리엄 뱅크스가 아닐까? 그녀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등에 근시인 두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 분명했다. 그건 그들이 결혼하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래, 그래야 한다. 얼마나 탄복할 만한 생각인가! 그들은 꼭 결혼해야 한다.

민음사, p. 116

결혼에 대한 그녀의 그 열광적인 집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릴리는 이젤 앞에서 이리저리 걸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민음사, p. 286

그래, 릴리의 말마따나 결혼에 대한 램지 부인의 집착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나도 주변의 어르신들 중 일부가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그들이 꼭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고싶어 안달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고,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램지 부인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릴리와 윌리엄스는 결국 이어지지 않았지만, 건설적이고 건강한 관계로 남았다. 폴 레일리와 민타 도일은, 결혼은 성사되었을지언정 완전한 결합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 광경을 릴리 브리스코가 고소한 듯이 바라보는, 그러니까 결혼의 필요성을 그렇게 강조했던 램지 부인을 다소간 비웃는 모습은 참 재밌다.

# 4. 램지 씨의 인정욕구

울프가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이 소설에서 남자들, 램지 씨와 찰스 탠슬리와 윌리엄스는 인정욕구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무언가 자신의 업적 내지는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성에 차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반면 여자들, 램지 부인과 릴리 브리스코는 남자들의 약동하는 자아를 인정해주고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가진 존재로 서술된다.

특히 램지 씨는 그 경향이 심했다. 당대의 석학일지언정, 그 명성이 다음 세대까지 미치지는 않을 범속한 학자이자 교수로서, 그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어떤 사람이 필요했고 램지 부인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준다.

그녀가 여자였기에, 하루 종일 사람들은 으레 이러저러한 문제로 그녀를 찾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했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원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고, 그녀는 종종 자신이 사람들의 감정에 흠뻑 젖은 스펀지일 뿐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민음사, p. 55

이젤을 그에게 1~2미터 더 가까운 곳에 세웠더라면, 어떤 남자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이런 감정의 토로를 막았을 것이고, 이런 탄식을 중단시켰을 것이다. 그녀가 여자이기에 이 끔찍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여자니까 그녀는 이런 상황에 처리하는 법을 알았어야 했다.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은 여자에게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뭐라고 했더라?) 오 램지 씨! 친애하는 램지 씨! 스케치를 하던 친절한 노부인, 벡위스 부인이라면 즉시, 그리고 적절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돼. 그들은 나머지 세상과 단절된 채 서 있었다. 그의 무한한 자기 연민, 공감에 대한 요구가 세상에 흘러나와 사방에 퍼지면서 그녀 발치에 웅덩이를 만들었고, 파렴치한 죄인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이 젖지 않게 치맛자락을 모아 발목 위로 약간 끌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민음사, p. 251

울프의 이런 통찰은, 아마도 울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세상에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인정욕구가 있어서 무엇이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려 하는 편이다. 또 한편으로는, 에고가 강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기꺼이 숙이고 그들을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램지 씨처럼 혹은 울프의 아버지처럼 지나친 자의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무자비할 정도의 인정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울프는 이 책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남성에게는 '불모성'이 있다고 말한다. (p. 137) 놋쇠부리나 언월도에 비교하기도 한다.

이렇듯 울프는 남자와 여자를 대조하며 설명하고 있지만, 남성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만의 방」에서도 울프는 남성이 창조해낸 수많은 업적들에 비해 여성은 한 것이 없다고 언급하듯이 「등대로」에서도 울프는 '남자의 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찰스 텐슬리는 우쭐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냉대를 받았지만 램지 부인이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가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는 기운이 났다. 비록 쇠퇴하고 있더라도 남자의 지성은 위대하다고 은근히 암시하고, 또한 모든 아내가 남편의 노고에 순종해야 한다고 넌지시 암시하는 그녀의 말에 그는 전보다 더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민음사, p. 20

# 5. 램지 부인의 죽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단연 램지 부인의 죽음이다. 마치, 울프의 어머니가 50세 즈음에 돌아가셨듯이, 램지 부인도 비슷한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게 되고, 그것은 이 공동체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램지 부인의 사인이 무엇인지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램지 부인이 죽는다는 사실은 정말 뜬금없이 서술된다. 1부에서 램지 가족의 만찬이 끝난 후 2부 3장의 마지막에 갑자기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오는 것이다.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럽게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민음사, p. 208

'열린책들'의 해설을 보면 울프는 처음에 이 소설을 구상할 때 본인의 아버지의 초상을 그린 소설을 쓰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만들어나감에 따라 본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넣어서, 혹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을 더 주된 내용으로 소설을 채우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램지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 Julia Prinsep Stephen의 현신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소설은 주로 램지 부인에 대한 찬양과 추모가 반복되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소설의 1부는 램지 가족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지만, 그 중심에는 램지 부인의 내적, 외적 아름다움에 대한 서술이 있다. 램지 부인과 앤드루, 프루의 죽음이 2부에 서술된 이후에 나오는 3부는 (다양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로는) 램지 부인에 대한 릴리 브리스코의 추모가 있다. 왜 램지 부인은 이 모든 것을 놔두고 하늘나라로 갔는지 궁금해하고, 램지 부인이 있었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릴리 브리스코의 장면들이 소설의 3부의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릴리 브리스코는 램지 씨의 놋쇠부리와 같은 맹목적인 인정욕구가 결국은 램지 부인을 해쳤다고 분노하고 있다.

저 남자는 결코 주지 않았어.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저 남자는 받기만 했어. 반면에 나는 줘야 한다는 강요를 받을 거야. 램지 부인은 주었지. 주고, 주고, 또 주다가 그녀는 죽었고, 이 모든 것을 남겨놓았어. 릴리는 램지 부인에게 정말로 화가 났다.

민음사, p. 245

# 6. 불가능을 향한 돌진

이처럼 릴리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램지 씨이지만, 그리고 일반적이고 점잖은 행동 양식으로 살아간다기 보다는 괴팍한 모습을 보이는 램지 씨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램지 씨를 미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램지 씨에게 불편을 느끼는 릴리 브리스코 마저도, 램지 씨의 친구 윌리엄 뱅크스가 그를 '위선적이다'라고 슬쩍 비난하자 램지 씨에게는 '작열하는 탈속성'같은 것이 있다며 램지 씨를 비호하기도 한다.

당신은 위대해요.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램지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마음이 좁고,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는 응석받이고 폭군이에요. 그는 램지 부인을 죽도록 지치게 해요.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이 없는 것이 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뱅크스 씨에게 말했다.) 작열하는 탈속성이랄까.

민음사, p. 43

램지 씨 혹은 울프의 아버지는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혹은 저술가였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성취하지는 못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그때문에 램지 씨는 아직 이뤄내지 못한 그 무언가를, 철학적 사유의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분투한다. A부터 Z까지 다 나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Q에서 그쳤지만 그리고 R에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보일지라도, 램지 씨는 최선을 다해 직업적인 소명을 혹은 철학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려 한다.

멍한 표정으로 섬을 왔다갔다 하며 읊어대는 테니슨의 시 「경기병 여단의 돌격」에서의 경기병들처럼, 램지 씨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모습은 마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생각나게 한다. 그가 자주 읊어대는 비극적인 시의 내용처럼 그는 기약없는 드높은 목표를 향해 돈키호테적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실은 램지 씨가 팔을 흔들면서 "용감하게 우리는 달렸지"라고 소리치며 갑자기 돌진해 오는 바람에 릴리의 이젤이 넘어질 뻔했다.

민음사, p. 31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벼락처럼 사납게, 매처럼 맹렬하게 말을 달려 죽음의 계곡을 지나온 자신의 업적에 대한 허영심과 만족감이 부서지고 파괴된 것이다. 빗발치는 탄환과 포탄을 받으며 우리는 용감하게 말을 달렸지. 일제히 쏟아지는 사격으로 천둥처럼 울리는 죽음의 계곡을 스치듯 지나서.

곧바로 릴리 브리스코와 윌리엄 뱅크스에게로 돌진하더니 그는 몸을 떨었다.

민음사, p. 52

대체로 램지 씨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비관적이다. 3부에서 돛배를 타고 등대를 향해 가면서도

우리는 죽어갔지 / 각자 홀로

We perish'd / each alone

와 같은 시구를 외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관점에서는 어리숙하고 이상할 지 몰라도, 그래서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본인은 진지하게 자신에게만 보이는 목표에 집중하여 모든 신경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램지 씨의 모습은 단지 버지니아 울프의 부친만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소설은 단순히 울프의 부모를 추모하는 글에 불과할 테니까. 램지 씨의 모습은 불가능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삶을 닮았다.

나 또한 살면서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수없이 꾸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까뮈가 말하는 시지프적인 부조리와는 다르다. 살면서 계속, 무언가 계속하여 개선을 요구하고 갈망하는 욕심을 내거나 꿈을 좇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게 있어서는 수학에 대한 이해,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 또는 책을 깊고 넓게 읽는 것에 대한 꿈 혹은 목표가 있다. 수학은 워낙 넓고 깊으니, 또 문학도 마찬가지이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파가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오히려 이 깊고 넓은 공간에 앉아 편안히 즐기는 정도가 내 깜냥이 아닐까. 나는 램지 씨처럼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으니까. 램지 씨가 Q에서 R로 가는 것에 고민한다면, 나는 그저 G에서 H로 가는 정도의 수준에 머무를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하릴없는 노력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램지 씨의 기약없는 돌진,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도전을 본문에서는 산정에 오르는 등산가에 비유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문필가 셰익스피어의 명성마저도 한낱 돌보다 더 영속하지 않을 것인데 자신의 성취는 도대체 세상에 얼마나 남아있을 수 있을지 의문한다. 하지만 높은 곳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는 고귀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은 빛은 그리 환하지 않게 일이 년 정도 빛나다가 그보다 더 큰 빛에 삼켜질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세월의 폐허와 별들의 소멸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올라선, 그 가망 없는 선봉대의 지도자를 누가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죽음이 다가와 그의 수족이 뻣뻣이 굳어 움직일 수 없기 전에 그가 마비된 손가락들을 의식적으로 이마에 올리고 어깨를 똑바로 펴서, 구조대가 왔을 때 자기 초소에서 죽은 군인의 훌륭한 풍채를 발견하게 된다면? 램지 씨는 항아리 옆에서 어깨를 쭉 펴고 꼿꼿한 자세로 섰다.

민음사, p. 60

# 7. 등대로

소설의 초입부터 램지 부인과 제임스는 '등대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주인공들이 자꾸 성에 들어가고 싶어하는데 그 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람들이 계속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램지 부인과 제임스는 무작정 등대에 가야 한다고 계속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램지 씨와 찰스 탠슬리는 날씨가 안좋아서 갈 수 없다고 일축하듯 말한다.

아니,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일부 나와있기는 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등대에 가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아내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보내 주곤 했소. 거기에는 결핵성 고관절염에 걸린 가엾은 소년, 등대지기의 아들이 있소.

민음사, p. 249

하지만, 소설의 제목이 '등대로'인 것을 보면, 그리고 3장에서 그동안 반대하던 램지 씨가 막내들을 데리고 등대를 향해 가는 장면을 보면, 등대로 간다는 것이 특정한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저 꾸러미를 가져오너라." 그는 등대에 가져가도록 낸시가 마련해 준 것들을 고개로 가리키며 말했다. "등대지기에게 줄 꾸러미를." 그가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뱃머리에 우뚝 섰다. 마치 그가 온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듯하다고 제임스는 생각했고, 캠은 그가 허공으로 뛰어오르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꾸러미를 들고 청년처럼 가볍게 바위에 뛰어 올랐을 때, 그들 둘 다 일어서서 그 뒤를 따랐다.

민음사, p. 337

램지 씨가 철학을 향한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사람이었던 것과도 조금 비슷하게, 램지 부인도 기약 없는 꿈을 좇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겟다. 램지 씨와 램지 부인이 이뤄놓은 이 공동체는 무엇을 지향했던 것일까.

실제로 이 공동체에는 잠재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똑똑하고 이지적이지만 남성우월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다투곤 했던 찰스 탠슬리와 그때문에 피해를 보곤 했던 릴리 브리스코가 있었다. 마지막 만찬에서, 램지 씨는 게걸스럽게 수프를 먹어대는 오거스터스 카마이클을 째려보기도 한다. '등대로' 가고 싶어하는 램지 부인과 제임스 램지의 바람에 램지 씨와 찰스 탠슬리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한다. 폴과 민타의 사랑은 램지 부인 생전에는 막 시작되는 단계였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램지 부인은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하려 한다. 고철을 녹이듯 모든 갈등을 녹여내어 새로운 모습으로 주조하려 한다.

사이가 좋지 않던 그 릴리 브리스코와 찰스 탠슬리마저도, 해변가에 앉아 편지를 쓰는 램지 부인의 앞에서는 어색하게나마 서로 어울리며 물수제비를 던졌다. 무자비할 만큼의 자의식과 인정욕구를 가진 남편의 내면을 다독여주고, 사회성이 없는 찰스 텐슬리 또한 보듬어준다.

램지 부인의 이타심과 동정심은,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부인은 실질적으로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부인의 죽은 후의 그 쓸쓸함과 고적함을 보면 알 수 있다.

개별성과 응집성. 두 가치는 모두 중요할 수 있겠고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펼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알 수 없는 힘으로, 인지하기 힘든 결속력으로 그들을 자연스럽게 묶었던 것은 램지 부인의 역할이었다.

등대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이나었을까.

# 8. 마지막 만찬

램지 가족의 만찬 장면을 보며 나는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찬 중에 소개되는 램지 부인의 감정과 음식이 나오기 전에 서술되는 그 장면들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쩌면 램지 부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관계 -- 그것은 이 소설의 내용 전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를 명시적으로, 진실되게 표현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된다면 해당 부분(제 1부 17장, p. 136-138)을 길게 발췌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이 소설이 걸작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부분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내 삶으로 무엇을 이룬 것일까? 램지 부인은 식당 상석에 자리를 잡고 식탁 위에서 흰 원을 이루는 접시들을 바라보면 생각했다. "윌리엄 내 옆에 앉아요." 그녀가 말했다. "릴리는 저쪽에." 그녀는 지친 듯이 말했다. 그들(폴 레일리와 민타 도일)에게는 그것이 있는데, 그녀에게는 오직 이것(무한히 긴 식탁과 접시들과 칼들)밖에 없었다. 저쪽 끝에서 남편이 눈살을 찌푸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왜 그럴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그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나 어떤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프를 떠 주면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지나왔고 모든 것을 통과했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어서 그 안에 휘말릴 수도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자신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찰스 텐슬리(그에게 "저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와 오거스터스 카마이클이 차례로 들어와서 앉는 동안에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누군가 자기 말에 대답하기를,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수프를 퍼 담았다.

괴리감(저것을 생각하면서 이런 일, 즉 수프를 퍼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에 눈썹을 치키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 회오리에서 벗어났음을 더욱 강렬하게 느꼈다. 혹은 어둠이 내려앉아 빛이 바래자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 듯이. 그 방은(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척 초라했다. 아름다운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녀는 텐슬리 씨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것도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각자 외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화합을 이루게 하고, 흐르게 하고, 창조하려는 노력은 모두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또다시 그녀는 남자들의 불모성을 별 적대감 없이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멈춰 버린 시계를 흔들듯이 자신을 약간 흔들어 일깨웠을 때, 시계가 다시 째깍거리기 시작하듯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 익숙한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꺼져 가는 불꽃을 신문지로 둘러싸서 보호하듯 아직도 약하게 뛰는 맥박에 귀를 기울이고, 지키고, 일으키려는 노력을 되풀이했다. 그런 다음에 윌리엄 뱅크스 쪽으로 (가엾은 사람! 아내도 자식도 없이 오늘 밤을 제외하면 매일 혼자 하숙집에서 식사하다니!) 그런 노력을 끝냈다. 이제 다시 스스로를 떠받칠 수 있을 만큼 생명력이 강해졌으므로, 그녀는 그에 대한 동정심에서 이 모든 일을 시작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돛을 보면서도 다시 항해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배가 침몰한다면 자기 몸이 바닷속에서 빙빙 돌다가 그 밑바닥에서 휴식을 얻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지친 선원처럼.

"당신에게 온 편지를 보셨어요? 홀에 두라고 했어요." 그녀는 윌리엄 뱅크스에게 말했다.

릴리 브리스코는 부인이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곳으로 표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으로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오싹해져서, 아련히 멀어지는 배의 돛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을 때까지 지켜보듯이 적어도 두 눈으로 그 표류를 따라가려고 늘 애쓰게 되었다.

그녀가 무척 늙어 보인다고, 무척이나 초췌하게 보인다고 릴리는 생각했다.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윌리엄 뱅크스에게 몸을 돌리자 마치 배가 방향을 돌리고 햇빛이 다시 그 돛을 비춘 것 같았다. 릴리는 마음이 놓여서 약간 즐거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왜 부인은 뱅크스 씨를 동정할까? 그의 편지가 홀에 있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런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가엾은 윌리엄 뱅크스라고 말한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한편 사람들을 동정하느라 지친듯이, 그리고 그녀 내면의 활력, 다시 삶을 이끌어 가려는 결심이 동정심으로 일깨워진 듯이. 그것은 옳지 않다고 릴리는 생각했다. 그것은 부인의 잘못된 판단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것으로 보였다. 뱅크스 씨에게도 자기 나름의 일이 있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자기에게도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즉시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래, 그 나무를 더 중앙으로 옮겨야겠어. 그러면 어색한 공간을 없앨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해야겠어. 곤혹스러웠던 문제가 그거였어. 그녀는 그 나무를 옮길 것을 기억하도록, 소금 통을 집어서 식탁보의 꽃무늬 부분에 내려놓았다.

민음사, p. 136-138

열린책들의 해설에서는 이 만찬 장면이 1부의 1/4이나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성경의 '최후의 만찬'과 연관시키기까지 한다. 실제로 이 만찬 이후에 (직후인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이후에) 램지 부인이 사망하게 되니 이 만찬은 구성상으로도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 9. 삶의 의미

소설 내에서는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고, 왜 사는지에 대해 자문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램지 부인은 만찬이 시작하기 전

하지만 나는 내 삶으로 무엇을 이룬 것일까?

민음사, p. 136

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이제는 어떤 회오리 바람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 윌리엄 뱅크스는 식사 시작을 기다리는 데에 지루함을 느끼다가 문득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민음사, p. 145

하고 자문한다. 심지어 인간이 매력적인 종인지 궁금해하며 '인간의 삶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도 질문한다. 릴리 브리스코도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할 수 있을까? 릴리 브리스코는 혼자 남겨진 후 커피 한 잔을 더 가지러 부엌에 가야 할지 아니면 그곳에 그곳에서 기다려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민음사, p. 239

하고 자문하고 램지 부인에 대해 회상하다가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민음사, p. 263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카마이클씨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 모두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라고 속으로 의문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도 대체로 삶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램지 씨, 릴리 브리스코 이들은 각자 살아가는 원동력을 어떻게든 간신히 만들어 내어 살아가고 있다. 한편 오거스터스 카마이클처럼 별 생각 없이 사는 것 처럼 보이다가 문득 시를 써내는 사람도 있고 찰스 탠슬리처럼 본인의 지성과 노력만을 철썩같이 믿고 앞으로 앞만 보고 나아가려는 사람도 있다.

# 10. 낙관 vs 비관

램지 부인은 가난한 이들의 자선사업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다리에 올라가 벽보를 붙이는 외팔 남자에 대해서도, 이웃집에 대해서도, 또 저 멀리 등대에 사는 등대지기에 대해서도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램지 부인은 주변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천사같은 사람이자,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램지 부인의 마음 속은 온갖 고민으로 가득 차있다. 램지 씨가 램지 부인의 '비관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도 묘사된다. (p. 195)

만찬의 마지막, 램지 씨는 엘튼의 '루리아나 루릴리'라는 시를 읊조린다. (p. 176-177) 이 시의 내용은 굉장히 희망적이지만 정작 램지 씨의 마음은, 자신의 저서나 업적이 초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또한 램지 부부는 현실적인(경제적인) 문제때문에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속내도 가지고 있다. 특히 램지 씨는 만찬이 끝난 후 서재로 들어가 월터 스콧의 소설 「골동품상」을 읽어가며, 요즘 젊은이들이 월터 스콧을 읽지 않는 것을 부정하려 한다. 다만, 그 읽는 내용은 주인공의 죽음을 다루고 있어 비관적이다. (p. 187-192)

결국, 램지 부인이 죽기 직전의 장면에서 램지 부부의 기분은 절망과 희망을 왔다갔다 한다.

그녀는 물었다. 이성이나 질서, 정의라고는 전혀 없고, 오직 고통과 죽음, 빈곤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마음 속으로 늘 알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리 비열한 배반도 능히 저지를 수 있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다. 어떤 행복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민음사, p. 105

# 11. 마치며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발제문에 기반한 글이다보니 구성이 정신없기는 하다.

여하튼 나에게는 9년이 걸려 읽은 책이라 참 각별한 책이다. 처음에는 진도가 그렇게 안나가던 책이, 민음사 버전으로 한 번 읽고, 다시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은 뒤에 또다시 민음사로 읽으려고 보니 술술 잘 읽혔다. 그만큼 한문장 한문장 잘 새겨가며 읽었던 책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더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3기니」는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읽지 않을 것 같고 「파도」나 「세월」같은 소설은 언젠가 읽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에드워드 올비가 썼다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는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퍼온 글>


블로그관리

반응형